지명/유래/전설전체 14건 중 15개 (1/1페이지)2024-03-29T20:51:02+09:00http://www.yymasil.co.kr/contents/rss_www_logo.pngurn:uuid:24909bb4-c7cd-2aae-061f-74c190c76529문암리(門岩里)urn:uuid:45d54543-c3c9-6a45-41e7-e14ecbb540382017-01-24T15:23:04+09:00관리자일월면에서 수비면으로 넘어가는 길목 양쪽으로 문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문방우 더러는 문망(門岩)이라고도 부른다. 문고개를 넘으면 영양읍과 수비와 봉화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비교적 논이 많이 있는 곳이다.
본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문상동과 문하동(門下洞)을 합하고 문암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되었다.개건너ㆍ아릇개건너ㆍ웃개건너urn:uuid:2f42ab96-c554-8f63-4500-ddc04b6d404b2017-01-24T15:22:40+09:00관리자문방우 서쪽에 있는 장군천을 건너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장군천 건너 아래에 있는 마을, 즉 당수구가 있는 곳이 아릇개, 장군천 건너 위에 과수원이 있는 위의 마을을 웃개라고 부른다(조유석(70) 제보). 아릇개건너와 윗개건너는 개건너의 아래 쪽과 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개는 옛말로 갈-걸이었다 다시 '갈'에 접미사 '이'가 붙어 갈이-가리가 되었다가 소리가 약해지고 떨어져 가리- 가이-개가 되기에 이른다.문방우ㆍ문암(門岩)ㆍ문상(門上)ㆍ문상동(門上洞)urn:uuid:fd3a3995-6982-69d6-2d18-9b7732c2d70d2017-01-24T15:22:26+09:00관리자1600년 경에 강(姜)씨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문처럼 생겼다고 문방우로 이름지었다가, 1800년 무렵 문상동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문암으로 개칭되었다(안진찬(65) 제보). 방우라 함은 이 지역의 말로서 바위를 이름이다.삼거리urn:uuid:c9aa0f7a-a470-e490-5de4-f253a8475a9b2017-01-24T15:22:09+09:00관리자문방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문고개를 넘어서면 영양읍ㆍ수비면ㆍ봉화군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이 있기 때문에 삼거리라고 부르고 있다(조유석(65) 제보).홈거리ㆍ홍꺼리(洪溪)ㆍ문하(門下)ㆍ문하동(門下洞)urn:uuid:a5f2e1ea-e08b-70ba-ed37-b70db016313f2017-01-24T15:21:47+09:00권자영약 300년 전, 노(盧) 일가가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 와 자리를 잡았으며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는 것을 보고 홍거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하천을 좌우로 하여 산기슭에 위치하기 때문에 논물을 대지 못하여 홈을 길게 판 통나무를 설치하여 물길을 끌었다. 이러한 나무 홈통으로 만든 수로가 많아짐에 따라 이것이 마을의 명물이며 특색을 이루어 홈거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문방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며 문하동으로도 불렀다(장숙환(55) 제보).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홈걸-홈거리-홍걸로 된 게 아닌가 한다. 홈이란 명사에 끝소리 기역(ㄱ)이 붙는 것을 고려하면 기역 앞에서 홈의 미음(ㅁ)이 이응(ㅇ)으로 소리가 바뀐다. 또 거리의 기본형은 걸-갈에서 갈라져 나온 형으로서 거리라고 본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웃문방우urn:uuid:8aa3b7e5-093e-8f77-a7e2-206ebe7db71f2017-01-24T15:21:33+09:00관리자문방우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원래 이 마을에 한정해서 불리던 문하리란 명칭이 행정개편 때 홍꺼리ㆍ문방우 등과 통합되면서 문암리에 해당되는 문방우와 함께 문상리라고 불리게 되고, 문하에 해당하는 홍꺼리와 구별하였다. 그러나 점차 문상리는 오히려 문방우에 한정하는 이름이 되고, 이 마을은 웃문방우라고만 불리고 있다(조유석(65) 제보).용화리(龍化里)urn:uuid:96d0fbf2-2ec7-adac-4e4f-808aa13c3b602017-01-24T15:20:56+09:00권자영볼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용화사(龍化寺)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용화곡(龍化谷) 또는 용화동 혹은 줄여서 용화(龍化)라고도 이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큰거리ㆍ절구골ㆍ항골ㆍ대티를 합하고 용화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했다주막거리urn:uuid:c2dfe6f5-ed79-0c82-ac57-0a829a07cf1c2017-01-24T15:20:17+09:00관리자일제 시대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이 곳에 주막을 차려 수비면 신암리의 비상광(碑霜鑛)에서 채굴한 비림을 싣고 옮기는 말 달구지가 하루 3,40 대가 이 곳을 지나면서 주막에서 쉬어 갔기 때문에 주막거리라고 하였다(조영석(64) 제보).벌매골(伐梅谷)ㆍ매곡(梅谷)ㆍ반매곡(盤梅谷)urn:uuid:9e7dded7-616d-33e7-eb73-e5c8a8b4c7572017-01-24T15:19:59+09:00관리자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매화가 떨어져서 반 위에 있는 모양을 한 한 묘지가 있다고 알려져 이른바, 그 매화낙지(梅化落地)를 찾기 위해 김씨(金氏) 일가가 머물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지고 벌매골 또는 매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홍영락(62) 제보).
의미 부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가 있겠으나 마을 이름들의 얼개로 볼때 매-미-물-의 걸림을 고려하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매곡(梅谷)의 '매'는 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매곡-물곡이란 걸림을 떠 올릴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삼국사기』에서 수원(水原)-매홀(買忽)의 대응에서 물이 '매'임을 알 수 있다.절구골urn:uuid:a16f6192-0135-3b55-904e-9e54c3d6bf9e2017-01-24T15:19:42+09:00권자영용화사에서 사용하던 호박이 마을 입구 하천에 떠 내려 와 있는 것을 보고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절구 이름을 본따서 절구골이라고 불러오고 있다(홍영락(62) 제보).항골ㆍ함골(函谷)urn:uuid:64b6519f-201f-d8db-e9c1-3b8954324f442017-01-24T15:19:15+09:00관리자옛날부터 산의 골짜기가 깊어 호랑이가 많아 이웃 마을에 내려 와 집짐승을 잡아 먹기 때문에 불안하였다. 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경주 배씨(慶州裵氏)가 큰 하정을 파 두고 머물면서 호랑이가 잡히기를 기다렷다. 함정을 여러 곳에 많이 파 놓아서 함골이라 불렀다고 한다(한동희(58) 제보).큰거리(大溪)urn:uuid:2a529de6-c2f4-a552-d488-de89e0d208c72017-01-24T15:18:59+09:00관리자북쪽과 서쪽의 깊은 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개울물이 합하여 큰 내를 이루며, 주변의 산세도 아름다웠다. 큰 시내 옆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처음으로 이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 곳을 큰 거리라고 불렀다 한다(김승규(55) 제보).
한자로 보아서 큰거리의 '거리'는 시내를 뜻하는 '걸'에서 비롯한 말로 보인다. 냇물이 있어야 농사를 잘 할 수 있으니 물이 삶의 원천이 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용화(龍化)urn:uuid:4f27de53-b510-dcac-3d85-28f1fe6cfba32017-01-24T15:18:14+09:00관리자옛날 신라 때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구룡 모두 하늘로 올라 가고 고구려 때 구룡이 하늘로 올라 간 이 곳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었으니 땅 이름 또한 용화라고 불렀다. 용화사는 지금 없어졌으나 유적으로 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지호동(59) 제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용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이 있다. 이는 물을 다스린다고 믿었던 용신앙이 땅 이름에 베어 들었기 때문이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칡밭모기ㆍ갈전(葛田)urn:uuid:0d914f39-6873-9ddb-3043-e54e68407ae52017-01-24T15:17:50+09:00관리자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칡이 온 산을 뒤덮어 칡을 심어 놓은 밭과 같다고 하여 칡밭모기 또는 갈전이라 불러 오고 있다(지호동(59) 제보). 갈전이라 함은 칡밭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